수원고등학교 개교100년역사관 수원고등학교(현재) |
한국전쟁 중인 1951년 학제 개편에 따라 중학교 6년제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6년제였던 수원중학교도 중, 고로 분리되어 수원중학교는 9학급, 학생수 848명, 교직원은 23명, 고등학교는 6학급 학생수 574명 교직원 22명으로 분리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수원고등학교 교장은 학제 개편 전과 마찬가지로 홍사운 선생이, 교감은 최병갑 선생이 취임하였다. 수원중학교는 병설학교이기 때문에 교장은 홍사운 선생, 교감은 나순강 선생이 맡았다. 그 당시 미국의 교육사조를 한마디로 요약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고전문화연구가 이성을 발달시키는 데 가장 필요한 매개체가 된다는 주장을 하는 항구주의를 비롯해서 학교는 지식을 획득시키는 것이 학교의 주목적이라고 주장하는 본질주의와, 지식보다도 아동성장과 경험의 중요성을 두는 진보주의, 그리고 위에서 말한 세 가지의 주의 중 각각 장점을 뽑은 절충사항을 말하는 재건주의 등이 당시의 교육사조라 할 수 있다. 결국 미국의 숭고하고 성스러운 종교 사상이 바탕에 깔린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정신에 입각한 교육이 우리 학교에도 도입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본교가 오늘날 어느 학교보다 자유로운 가운데 민주적 교육방침을 추구하는 것은 선각자적 사고를 가진 교수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전흔의 상처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외부의 지원도 받고 자체의 노력과 기성회의 도움도 받으면서 학교는 안정을 찾았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교실 복구와 일부의 교실을 증축하여 학교의 면모를 갖추고 과학실의 개보수와 도서관의 정비 등 산적해 있던 어려운 일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여 학교가 정상화되고 학습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제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며 대학진학을 목표로 교사와 학생 모두가 몰두하는 시기가 되었다. 본교는 이 지역의 중심학교로 경기도 일원의 학력 우수생들이 지원하여 입학하기가 꽤난 어려운 학교였고 수학 능력이 뛰어나 대학진학은 물론 각 방면에서 우수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수원 인근 지역에 지역을 대표하는 고등학교들이 있기는 했어도 본교의 위상을 뛰어 넘지는 못했다. 따라서 지역의 우수한 인재들이 서울로 유학을 가지 않고서는 본교로 몰려 올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고, 우수 인재들이 모여들다보니 본교의 위상은 자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교의 학생들이 각종 대회에 출전하여 상을 휩쓸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학예와 과학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운동경기에서까지 두각을 나타냈다. 교육적 성과는 개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학교의 명예를 한껏 높여 우리 학생들의 교복 입은 모습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우리 학생들도 그 자부심이 매우 컸다. 사학이면서 그 지역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학교는 전국에 걸쳐서도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지역 안에서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본교의 이름도 지역 안 인문계 고등학교로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붙일 수 있었던 영광스러운 학교명이다. 뿐만 아니라 우수 인재들이 치열한 경쟁을 통하여 입학하였기에 수원고등학교는 수원의 자랑이었고 지역을 상징하는 학교였다. 설립 이념 또한 애국애족이라는 이상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교육을 실천하여 왔다. 순수한 민족자본만으로 설립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온 본교는 애국애족의 정신적 이념으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이어온 전통사학임을 자부한다. 종교재단이나 외국재단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고 순수한 지역 유지들과 뜻있는 분의 숭고한 애국정신에 입각하여 설립된 학교이기에 주민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여건 속에서 성장해 온 본교는 언제나 지역을 대표했으며 문화의 산실로서 그 위상을 지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도 1950년 한국전쟁의 시련과 폐허가 아픈 상처이기도 했지만 피난민 학생들을 수용하고 상이용사 등을 받아 교육하였던 것은 우리의 교육이념과도 일치하는 것이어서 뜻 있는 교육이었다고 할 것이다. 1950년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어려운 시기이기는 했어도 본교는 보람있게 후진을 양성하고 교육의 성과를 크게 고양시킨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우수 인재들의 집결뿐만 아니라 대학진학 성과, 그리고 전국대회에서 개인의 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각 분야에서 입상하는 전적을 올리기도 했다. 1990년 3월 2일 홍귀선 선생이 교장, 이덕선 선생이 교감에 취임하게 되었고 홍순복 선생이 교무주임, 홍승복 선생이 학생주임에 각각 임명되었다. 1993년에 36개 학급으로 증설인가를 받음으로써 시내 인문계 고등학교의 학급수와 같게 되었다. 교원의 수도 70년대 20여명에서 70여명으로 늘어 학교가 급격히 비대해졌고 가족적으로 운영되었던 학교 경영은 법과 제도의 틀에서 운영할 수밖에 없는 규격화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평준화 이후 정부에서는 사학에도 인건비의 보조와 증개축에 필요한 운영자금도 지원하게 되었다. 국공립학교와 똑같은 지원은 아니라 해도 재정 결함보조금을 지급받게 됨으로 해서 인건비의 부담이나 운영상의 어려움을 많이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지원을 받음으로써 사학은 관할 청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자의적인 법해석으로 운영되었던 학교운영은 국공립학교와 똑같은 테두리에서 간섭과 지시를 받게 되어 사학의 자율성은 퇴색되었다. 평준화가 시행된 이후 본교의 진학지도 상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전통 있는 사학의 뿌리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교육 이념이 쌓이고 쌓여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기에 다른 학교에서 찾을 수 없는 전통과 우리만의 이미지가 생성되는 것이다. 새 건물, 젊은 교사들로 짜인 신진 학교들의 교수학습방법이 본교보다 새롭거나 교실환견이 새 교실이어서 본교의 교실보다 특별히 좋은 것이 없는 천편일률적인 우리나라 교육의 본질로 보면 대동소이한 것이기에 입학 후 노련한 교사들의 본교의 전통과 역사를 통한 교육이 이뤄지면 학생들은 대부분 자랑스러운 학교 이미지에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된다. 지역사회를 선도하는 졸업생들이 면면히 소개되고 시내도처에서 만나는 선배들의 따뜻한 격려와 후배 사랑이 재학생들에게 애교심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본교의 특유한 자율 속에 질서 민주적 학생지도 등은 학생들에게 스스로 공부하는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따라서 본교의 대학 진학률이 높은 것은 스스로 자기의 일을 찾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우치는 교육의 힘과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는 지혜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진학지도 우수학교로 매년 표창을 받게 되었다. 진학지도에 대한 학교 표창과 교사의 개인 표창을 받게 되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 매년 대학진학에 있어 수원지역에서 가장 우수한 입시결과를 내고 있으며, 동문들에 있어서 학계, 교육계, 정관계, 법조계, 의학계, 언론계, 외교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적 역할과 업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교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다. 2008년에는 수고 제42회 졸업생 김승현, 수고 제54회 졸업생 김배현 동문이 법무부 주관 제 50회 사법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법조인으로서의 첫발을 들여 놓는 혁혁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단체에 있어서 2007년에는 경기도 과학교육 우수학교로 선정되었고, 2008년에는 한국청소년연합 주최 제7회 환경작품공모전 최우수학교로 선정되는 등, 끊임없는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며 괄목할만한 성장의 길을 선도하는 학교로 발돋움하고 있다. 2008년 9월 1일 제10대 교장 박성준 선생의 취임 이후 학교의 역사적 창립 정신을 바탕으로 전통과 명예를 존중하며, 새천년 새로운 도약과 미래 창조라는 목표의식을 갖고 전교사와 함께 2009년 기축년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