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고등학교
개교100년역사관
설립배경을 안내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기관은 공교육기관으로는 향교가 있고 사학의 교육기관으로는 중종 36년에 시작된 서원이 있다.

그러나 서원은 본래의 교육 취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세력을 유지하는 데 집착하여 파당을 만드는 본류가 되어 본래의 설립 취지인 학문과 덕행을 닦고 유학을 발양시키는 수련장으로서의 역할을 못함으로써 대원군에 이르러 서원을 폐쇄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사학의 시발이었던 서원이 무너지고 난후 지방 교육기관으로서는 서당이 그 명맥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훈장이 직접 운영하는 자영 서당이 있었고 고을 유지가 서당을 세워 자제나 친지들의 자제 등을 모아 교육하는 체제의 서당, 마을의 뜻 있는 유지 몇 명이 힘을 모아 훈장을 모셔오고 서당을 차리는 경우의 서당, 마을 전체가 힘을 모아 서당을 만들고 훈장을 초빙하여 교육하는 형태의 서당도 있었다. 한문을 중심으로 하는 독서와 서도를 교육과정으로 가르쳤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외침에 의한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그것을 수용하기 위한 어학원의 필요 등 개화와 맞물려 신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고 의무 교육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의무교육에 대한 논의가 구한말 개화파 인사들의 개별적, 산발적인 주장을 거쳐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 이후에는 집단적, 지속적으로 주장되고 있던 시대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때라 수원지역에서도 사립학교를 설립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수원군 청호면 오산리 시장 주민들은 ‘진명 학교’ 설립인가를 요청했고 노동야학의 운영을 모색하기 위하여 1908년에 설립된 노동학회 경기지회의 취지에 따라 ‘수원 노동 야학회’ 지부도 설립되었다. 그리고 기호흥학회 수원지회장이었던 전 판서 김종한이 ‘명륜학교’의 설립을 학부에 청원했고 남곡면 근동에는 ‘진명학교’ 수원에는 1902년 ‘삼일학교’와 1909년 ‘수원상업 강습소’가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수원에는 구한말 ~ 1910년경까지 ‘수원 수성학교(須成學校)’, ‘남양 진흥학교’ ‘양성학교’, 남양 사립 ‘진성소학교’ ‘수원 농림학교’ ‘수원공립보통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무산아동을 교육시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자 구국의 길이 교육이며 애국운동의 실천은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이 고을 저 고을에서 학교 설립에 힘을 모았다.

따라서 본교가 설립되면서 내세운 건학 이념도 애국애족이 그 근본이다. 본교는 건학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문산 아동의 교육과 무지한 서민들을 계몽하여 개화에 동참시키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는 큰 뜻과 조국의 주권회복이라는 명분을 교육의 당위성으로 깔고 있었다.

당시 지역 유지들의 건전한 사고, 신문화에 대한 기대와 깨우침, 그리고 애국애족이라는 이념까지 합쳐 지역과 나라를 사랑하는 유지들은 지역의 희망이었다. 이와 같이 부호의 자제들과 유지들이 지역을 이끌며 학교를 설립한 것은 이 지역 개화문화를 앞당겼음은 물론 지역 발전의 견인차 역을 훌륭히 해 낸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