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고등학교 개교100년역사관 6년제 수원중학교 시기 |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학제개편에 따라 수원상업전수학교는 폐지되고 수원중학교 6년제가 되었다.
1949년에 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고 1953년 2회를 끝으로 6년제 수원중학교를 마감하게 되고 학제 변경으로 수원고등학교 3년 및 수원중학교 3년으로 1951년 8월 31일 인가되었다.
따라서 1953년 3월 22일에 수원중학교 2회, 수원고등학교는 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1년 수원중학교 4년제 1회(당시 수상 2학년생 대상) 수원중학교 3년제 1회(당시 수상 1학년 대상)를 졸업시키고 일제 치하에서 마음놓고 배우지도 못하고 가르치지도 못했던 시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정규학교 교육계획에 의하여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교가 되었다. 따라서 해방감으로 들떠 있는 무질서의 사회로부터 안정된 사회가 무엇보다도 급선무였기에 교육의 방향도 민족의식의 고취로부터 점차 민주시민교육으로 그 방향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1946년 8월에 수원중학교 6년제 인가를 얻어 명실상부한 경기 한수 이남 지역 최고의 명문교로서 그 명성을 떨쳐왔다. 수원을 비롯해서 화성, 용인, 오산, 안양 등 인근지역과 멀리로는 경기 일원에서 서울로 유학을 간 학생을 제외한 대다수의 인재들이 밀려들어 입학경쟁이 치열했다. 인근지역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로 명성을 날렸고 경기의 자랑인 학교로 발돋음했다. 수원중학교 초대 교장인 홍사운 선생은 교육 기본 철학인 ‘성실’을 교훈으로 삼고 인간다운 인간을 교육하는데 심혈을 쏟았으며 그 바탕 위에 신학문을 교수하는데 뜻을 두고 있었다. 6년제 수원중학교로 인가 받은 후부터 매년 증가하는 입학 희망자들로 수원중학교에 입학하기는 5.6:1이라는 경쟁률 때문에 해마다 어려웠다. 따라서 수원중학교에의 입학은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성적이 높은 학동이 아니고서는 넘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우수학생이 모인 집단이라 교과목 중심의 학습도 뛰어났고 특기 발표에서도 타교의 추종을 불허했다. 웅변대회를 비롯해서 각종대회에 참가해서 상이라는 상은 모두 휩쓸어 오는 쾌거를 낳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를 지역 문화의 산실로 만들기 위해 예체능 교육과 각종 행사를 학교에 유치하여 새로운 문화전파에도 힘을 쏟았다. 수원상업전수학교 시절부터 있어 왔던 악대부도 지역민의 사랑을 받았고 축구부는 수원 사람들의 자랑이기도 했다. 또한 학생들은 농번기가 되면 일손 돕기에도 나섰고, 불의에 항거할 줄도 아는 정의와 애국심으로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민족상잔의 뼈아픈 시련을 겪게 되고 남북이 갈리는 최악의 사태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전 국토에서 일어났다. 수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가지가 폐허가 되고 인명 재산피해가 극심했다. 따라서 학교도 역시 많은 피해를 보았다. 건물이 파손되고 남아 있는 건물도 유리창과 창틀이 모두 부서지고 일부 벽이 무너지는 등 학교로서의 기능을 되찾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학교 재건을 위해서 교직원과 학생 등 모든 학교 관계자들이 발벗고 나서서 복구를 했다. 삽과 곡괭이를 들고 먼지투성이 속에서 일손을 돕는 어린 학생들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배었고 민족비극의 모습을 실감하며 망연자실해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