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고등학교 개교100년역사관 화성학원 시기 |
1916년에 수원상업강습소를 확대 개편하여 화성학원으로 한 단계 수준을 높여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수원상업 강습소에서 해 오던 교육과정에다 신교육사조에 맞춰 폭 넓은 교육과목과 실기 위주의 교육에 치중하였다. 수신, 한문, 역사, 수학, 농업, 상업, 영어, 체육, 미술, 실업 등을 교과목으로 가르쳤고 교과목 시간에 애국과 민족 사상을 일깨우는 일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본교의 교사들은 더 강한 의욕으로 민족혼을 부르짖었고 국권회복 정신을 강도 높게 일깨워 갔다. 화성학원은 이 지역 문화의 산실로서의 역할도 주도적으로 해왔다. 이 지역 신문화운동은 화성학원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문화 보급은 신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이 그 매개가 되어 지역을 선도하게 되었고 애국운동도 학생들을 통해 확산되어 갔다. 추계 체련 대회는 수원 읍민들에게는 잔칫날과 같았다. 지역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누면서 학생들의 운동회를 지켜보며 우의를 다지기도 했고 나라 걱정도 함께 하였다. 화성학원의 행사는 학원만의 행사가 아니라 읍내 유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육과 애국 등을 논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원생들은 학업만이 아니라 생산증대를 위해 모내기, 추수기의 일손돕기 등을 펼쳐 지역민과의 유대강화는 물론 농사지식을 보급하고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를 통한 애국애족의 정신적 토양을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여학생들에게는 재봉을 가르쳐 생활복 개선과 실생활 개혁에도 노력하는 등 지역에서 늘 앞장서 가는 문화의 선지자적 역할을 하였다 할 수 있다. 학원이 경영난에 봉착할 때에는 지역 유지들의 지원과 성원으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화성학원이 읍민의 학교였고 민족 자본만으로 유지 경영되는 민족 학교 역할을 하였음을 보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1932년 21회 졸업생 40명을 배출한 것에 비하여 1939년의 28회 졸업생수가 73명이었음을 보면 화성학원이 크게 발전해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