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메인메뉴 바로가기
s_visual (17).png

화성학원 시기

수원고등학교 개교100년역사관 화성학원 시기

  • 1916년에 수원상업강습소를 확대 개편하여 화성학원으로 한 단계 수준을 높여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수원상업 강습소에서 해 오던 교육과정에다 신교육사조에 맞춰 폭 넓은 교육과목과 실기 위주의 교육에 치중하였다.
  • 수신, 한문, 역사, 수학, 농업, 상업, 영어, 체육, 미술, 실업 등을 교과목으로 가르쳤고 교과목 시간에 애국과 민족 사상을 일깨우는 일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본교의 교사들은 더 강한 의욕으로 민족혼을 부르짖었고 국권회복 정신을 강도 높게 일깨워 갔다.

화성학원 시기 이미지

화성학원 시기 이미지

  • 지역의 존경받는 지식인들인 교사들은 신학문을 통해 무지한 삶들을 일깨우고 계몽하는 데에도 크게 힘을 보탰고 나라를 늘 걱정하는 우국지사적 사고로 암암리에 반일 사상 주입에도 힘을 썼다.
  • 화성학원은 이 지역 문화의 산실로서의 역할도 주도적으로 해왔다. 이 지역 신문화운동은 화성학원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문화 보급은 신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이 그 매개가 되어 지역을 선도하게 되었고 애국운동도 학생들을 통해 확산되어 갔다.
  • 추계 체련 대회는 수원 읍민들에게는 잔칫날과 같았다. 지역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누면서 학생들의 운동회를 지켜보며 우의를 다지기도 했고 나라 걱정도 함께 하였다. 화성학원의 행사는 학원만의 행사가 아니라 읍내 유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육과 애국 등을 논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 따라서 원생들은 학업만이 아니라 생산증대를 위해 모내기, 추수기의 일손돕기 등을 펼쳐 지역민과의 유대강화는 물론 농사지식을 보급하고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를 통한 애국애족의 정신적 토양을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여학생들에게는 재봉을 가르쳐 생활복 개선과 실생활 개혁에도 노력하는 등 지역에서 늘 앞장서 가는 문화의 선지자적 역할을 하였다 할 수 있다.
  • 학원이 경영난에 봉착할 때에는 지역 유지들의 지원과 성원으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화성학원이 읍민의 학교였고 민족 자본만으로 유지 경영되는 민족 학교 역할을 하였음을 보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 1932년 21회 졸업생 40명을 배출한 것에 비하여 1939년의 28회 졸업생수가 73명이었음을 보면 화성학원이 크게 발전해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라 하겠다.